한국현대건축 1세대 김중업 건축전

[김중업 다이얼로그 전] 8월 30일-12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서 열다.

 3000여점 소개 / 김중업건축박물관의 소장품과 이번 전시를 위해 제작된 사진과 영상 신작 등 3,000여점의 작품과 자료가 선보여 김중업의 모든 것이 소개된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김중업건축박물관(이사장 최대호 안양시장)과 공동 주최로 한국 현대건축의 거장 '

김중업 건축가가 1961년에 지운 프랑스 대사관 리모델링에 대한 설명을 하는 정다영 학예연구사

이건 건축이 아니라 설치미술이다] 아래작품 제주대학교 본관

'김중업 다이얼로그'는 김중업의 사후 30주기를 맞아 기획된 특별 전시다. 이번 전시는 그의 생애와 작품 전반을 다루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한국에 모더니즘 건축을 선보인 1세대 건축가’라는 한국건축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한 예술가 김중업의 또 다른 면모를 조명한다

*위 건물 소개 김중업이 1965년 설계하여 1969년 준공된 건축물이다. 이곳은 김중업 스스로도 소중한 작품이라 말하며 길이 남겨 두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고 종종 언급했던 건축물이다.

5.16 직후 제주대학에 부임한 문종철 학장의 도움으로 설계의도가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반영될 수 있었다. 이 건물은 건축가 자신뿐 만 아니라 건축계에서도 ‘21세기의 건축’이라는 평가를 받는 독특한 작품이다.

건물 각 부분의 기능을 외부에서 알아볼 수 있도록 형태화시킨 특징이 있으며, 곡선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표현하였다. 유람선, 헬기 등을 연상시키는 조형물로 동시대에 설계한 주한프랑스대사관과 함께 김중업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건축물이다.

1984년 보수공사를 통해 창틀이 아치형에서 장방형으로, 건물 외벽은 미색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말 옥상콘크리트에 구멍이 뚫리고 건물기둥의 부식 정도가 심해 1992년 폐쇄되었다가 1996년 결국 철거되었다.

마리관장의 축사

마리 관장의 평가 쉽지 않다. 수우미양가로 평가하면 수-, 우+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전시를 큐레이터중심으로 하고 있다 국립은 수많은 소관장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다다익선만 해결하면 더 좋은 점수룰 줄 수 있다. 이 문제에서는 적극적이지 않다. 관장의 임기 연장(3년)는 올 말(10월-11월)에 결정된다 한국에는 정말 드물게 글로벌 마인드의 관장이 있겠지만 그런 분이 된다는 보장도 없고 그들이 되기 힘들다면 마리관장이 적합하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정다영, 김형미 공동큐레이팅) 수준 이제는 국제급이다 [화면건물] 건국대학교 도서관은 서울시 광진구에 위치한 지상4층, 연면적4,125㎡의 규모의 철근콘크리트조 건물이다.

1956년 설계를 시작으로 1958년 준공되었으며 1976년 열람실 증축공사가 진행되었다. 현재는 건국대학교 언어교육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 건축물은 도서관의 기능적인 측면에서 여러 차이점을 보이고 있으나 기본 형태는 파리에 있는 유네스코 본부의 건물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김중업은 설계 당시 ‘Y’자형 건물에 학교 전체를 상징하는 강한 조형성을 부여하였으며, 둥근 지붕을 중앙에 얹어 이를 더욱 강조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상황으로 처음 건축가의 설계 의도와는 다르게 시공되었다. 시대를 기억하게 하는 건축물을 많이 시도하다. 미술이 되려는 건축이었고 건축이 되려는 미술이었다.


김중업(1922년 평양출신) 건축가 한국건축의 근대화(현대화)에 초석을 놓은 사람이다 아버지 세대(한국건축1세대)지만 그 당시에 이런 미술이 되려는 건축 건축이 되려는 미술을 했다는 것은 획기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제가 만들어놓은 어설픈 도시에 근대적 건물 풍경을 디자인 한 사람이다 이 천재는 박정희와 대결할 수 밖에 없었고 8년 간 공식적인 건축활동을 펼치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감옥을 가야 했다


김중업전 전시 섹션별 내용 [프롤로그] 매트릭스 [1부] 세계성과 지역성 [2부] 예술적 사유와 실천 [3부] 도시와 욕망 [4부] 기억과 재생 [5부] 김중업 살롱으로 나뉜다

이번 전시디자인은 김중업의 대표적 차양막 건물인 서강대 구조물의 그런 유형적인 분석을 통해 거기에서 아이디어를 차용했고 이번 전시장에 적용해 현장화했다 여기에는 60년대 미니멀리즘 적 요소도 보인다. 그리고 사회적 매락도 역시 담겨 있다 건축을 용도 변경하는 실험 등 열린 가능성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평양 출신으로 1941년 일본 요코하마 고공(橫浜高工) 건축과를 졸업했고, 1945년 조선주택영단 기수(技手)로 재직했으며, 194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조교수가 되었다. 1952년 이탈리아 베니스에서 열린 국제예술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 도불(渡佛)하여 1956년까지 르코르뷔지에 연구소에서 건축학·도시계획 등을 연구했다. 귀국과 함께 김중업 건축연구소를 설립, 후진양성에 힘쓰는 한편 개인전을 가졌고 홍익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1956년 이래 국전 심사위원, 1961년 문화재 보존위원, 1961년-1963년 문화자유회의전 준비위원, 1965년 현대작가초대전 운영위원을 역임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63년 도미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의 한국관 설계를 담당했다. 대표 작품으로 부산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서강대학교 본관, 프랑스 대사관, 뉴욕 세계박물관회 한국관, 31빌딩 등이 있다. 김중업이 설계한 유유산업 안양공장 건물이 리모델링되어 김중업박물관이 설치되었다.


[1] 한국 현대 건축 1세대 ‘김중업’의 최초 대규모 기획전 [2] 김환기, 이중섭, 윤명로, 이승택, 백금남 등 당대 예술가·지식인과의 협업 및 교유관계 조명 [3] 사후 30주기를 맞아 김중업건축박물관과 공동 [4] 30여 년 동안 설계한 건축물과 관련된 사진과 자료 3천여점 대거 공개 [5] 김중업의 주요 건축을 새롭게 촬영한 사진과 영상 신작 전시 [6] 학술 심포지엄, 건축 답사 프로그램 등 연계 프로그램 진행

김중업 매트릭스 [그의 건축도표]

전시 도입부에 해당하는 ‘김중업 매트릭스’는 김중업 작업의 연대기를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창작의 기원을 쫓아간다.시간 축에 따라 건축 이미지가 교차되는 이 공간은 비교적 우리에게 덜 알려진 김중업 후기 작업에서 시작해 전기 작업까지 역추적 방식으로 그의 건축언어를 추적한다. 함께 사진과 텍스트로 소개한다. 한국전쟁으로 초토화된 한국의 도시가 어떻게 건축이미지를 통해 변모해 왔으면 그런 사회문화적 문맥을 읽어낼 수 있는 여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의 후기 작품을 통해 그의 자장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과거사진과 현대사진을 대조시켜 건축의 의 진경을 보다 구체화하고 가시화 현실화하고 있다


건축물이 완공되었을 당시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남긴 흑백 사진과 현재 새롭게 촬영한 동일한 건물의 컬러 사진이 앞뒤로 붙어 건축의 시간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김중업 건축 작업의 목록을 지형도로 만들어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김중업이 뿌린 건축의 흔적들을 살펴본다.

삼일빌딩은 1969년 설계되어 1970년 준공되었다. 서울시 종로구 소재의 지하 2층, 지상 31층, 연면적 36363.80㎡의 철골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단순한 직립 입체 모양이며 재료는 검은색 철과 착색유리로 제한되었고 장식은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해당 건물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적 언어가 읽히기 보다는 미스 반 데 로에의 시그램 빌딩과의 유사성이 거론된다.

1970-1990년 대부분의 초고층건물 설계가 외국인에게 맡겨진 것과 달리, 기본설계부터 완공까지 한국 건축가인 김중업에 의해 지어진 초고층건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31층짜리 건물을 짓는다는 것은 당시로서 굉장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삼일빌딩은 1980년대 많은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기 전까지 서울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당초 계획은 140m의 높이였으나 풍압으로 인해 115m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이로 인해 층간 두께가 매우 얇게 처리되어 더욱 날렵하고 아름다운 비례가 도출되었다. 이 건물은 김중업의 오피스 빌딩 중에서 가장 수작이라 할 수 있다.

유엔기념묘지 정문 (현 유엔기념공원 정문)

김중업 건축의 관전 포인트는 모든 건축에 기둥 모양, 창문 모양, 문 모양, 지붕 모양, 벽 모양 등 어떤 부분이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은 그의 건축언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러 건축물을 통해서
그런 패턴이 반복되는 재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새롭고 실험적인 건축을 다양하게 시도함으로써 당시 대중의 문화적 눈금을 높이는데도 기여했다


<도시와 욕망>‘도시와 욕망’은 김중업 건축을 ‘도시’라는 문맥을 통해 살펴본다. 그 동안 김중업의 작품은 주로 근대 조각 같은 자체 완결적인 조형적 측면으로 읽혀졌다. 하지만  김중업의 복잡다양한 후기 작업을 읽기 위해서는 빠르게 성장하는 한국 도시의 발전 조건들과 연관시켜 볼 필요가 있다. 

김중업은 삼일빌딩, 도큐호텔, 중소기업은행 본점 빌딩, 갱생보호회관 등 도심 안에 당대 기술과 자본을 응집시킨 많은 빌딩을 지었으며, 1980년대 전국으로 확산된 지방 도시의 문화시설을 맡아 설계했다. 또한 변화하는 사회 구조에 따라 산부인과, 쇼핑센터 등 전에 없던 새로운 시설들과 독특한 개인주택들을 구상하며 급변하는 도시 속에 쉽게 변하지 않을 이상적인 공동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세계성과 지역성> 우리나라에 현대 건축의 조형 언어를 소개한 김중업은 ‘한국적 모더니즘’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작업 세계 안에는 ‘세계성과 지역성’이라는 두 가지의 가치가 공존한다. 요코하마 고공의 나카무라 준페이 교수의 지도 아래 프랑스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 식의 교육을 받은 김중업이 르 코르뷔지에를 동경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일본과 프랑스를 거쳐  ‘현대 건축’을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고 이를 한국 및 해외에서 작업과 교육활동을 통해 실천했다. 한편 그는 문화재보존위원회 위원, 석굴암 전실 연구, 국립경주박물관 계획 등을 진행하며 한국 전통을 탐구하기도 했다. 1959년 파리에서 돌아와 김중업건축연구소를 개소한 그는 부산대학교 본관, 서강대학교 본관, 건국대학교 도서관 등을 발표했으며 주한프랑스대사관 작업으로 한국의 모던 건축을 대표하는 작업을 남겼다.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 단체사진. 르 코르뷔지에 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이 사진의 첫번째 줄 오른쪽 두번째가 르 코르뷔지에다. 두번째 줄 왼쪽에서 네번째는 그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중업 선생이다. [사진 안양문화예술재단]

<예술적 사유와 실천> 김중업은 예술가로서의 건축가 상을 평생 추구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서 건축을 자율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한 시대적 요청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1956년 파리에서 귀국 후 건축가로서는 최초의 개인전이었던  《김중업 건축 작품전》을 개최했으며,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건축가의 작가적 입지를 알리는 데 힘을 썼다.

또한 김중업은 해방공간 부산 시절부터 교유했던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들의 전시나 작품을 후원하는 등 문화예술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김중업은 주한프랑스대사관, 올림픽 세계평화의문 등을 통해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했으며,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타피스트리 등을 건축에 접목하며 건축을 매개로 한 총체예술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 섹션에서는 1971년 귀국 직전에 프랑스 영화감독과 함께 주한프랑스대사관과 삼일빌딩, 도큐호텔 등을 배경으로 만든 건축영화 ‘건축가 김중업’도 상영한다

건축가 김중업은 한국 전쟁으로 부산에 머물며 예술가들과 활발히 교류하던 그는 1952년 베니스에서 열린 제1회 세계예술가회의를 계기로 1952년 10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파리의 르 코르뷔지에의 아틀리에에서 일했다.

그는 귀국 후 서울에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부산대학교 본관, 주한프랑스대사관 등을 설계하며 모더니즘과 한국의 전통성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김중업 당시 사회문화적 맥락을 내다보며 이미지의 힘을 보여준 건축가 / 그는 1952년-1957년 르 코르뷔지에 아틀리에(파리) 유학했다는 것 자체가 당시로는 드물게 앞선 삶을 산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전쟁 통에 유학을 했다는 소리다 모더니즘과 한국의 전통성을 결함한 독창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에 모더니즘 건축을 선보인 1세대 건축가"로도 평가받는다

<김중업은 그가 48세가 되는 한국의 1970년을 어떻게 읽어냈는가 궁금하다>

1970년 하면 한국의 산업화시대가 이제 막 도약을 하려고 큰 자세를 취하는 시기였다 반면 전태일이 분신을 할 정도고 노동자의 조건은 최악의 시기였다는 건 그만큼 산업화가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좋든 싫든 그 당시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김중업 삼일빌딩 지금은 사라진 오피스 건물이다 [사진] 아래 1970년대 31층 당시로는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1965년 설계, 1967년 준공된 서병준산부인과의원은 현재 장충동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향하는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축물은 김중업 건축 모티브의 하나인 ‘증식하는 원’의 구성방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산부인과 병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대지조건이 협소하고 세모진 대로변에 위치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조형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가능한 곡선을 사용하여 독특하면서도 기능적으로 설계되었다.

특히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자유로운 곡선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며 투명한 유리창과의 대비를 통하여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조형성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현재는 아리움 디자인회사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용도 변경을 하면서 공간을 확장하였다.

그는 건축가이면서도 시인적 관점 미술관의 시선 인류학적인 지식을 통해 사람이 건축을 어떻게 누리며 살 수 있는 지 그리고 건축언어를 통해서 그 시대의 표정과 관심거리를 읽어낼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미지의 힘을 아는 건축가였다.

김중업 
건축도 미술처럼 시대정신의 반영이라는 말을 하면서 동시에 위와 같은 말을 남겼다 그는 건축을 예술적 실천으로까지 끌어올리고 요즘 유행하는 협업을 통해 건축언어의 극대화와 확장에도 힘썼다 전통과 현대이 하모니에 전념했다 건축을 완성품으로 보기보다는 예술의 구축과 생산물 과정으로 사회문화적 매락을 읽어내는데도 관심을 보였다 그의 건축을 과거와 현재의 교차점을 보여주면서 시대를 잇는 다리역할도 했다

건축물과 관련된 3000여점의 자료 공개

전통을 바탕으로 한 건축의 모더니즘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로는 보기 드문 유리채광 방식의 건축


[박정희와 김중업의 대결]사실 그는 그렇게 건축가로서의 품의와 경제적 여유로움을 유지하고 살 수 있었다. 하지만...그는 당시 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대항한다. 아니...그저 건축가로서 해야 할 말을 할 뿐이었죠. 문제는 당시 시대가 ‘할 말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는 것.

김중업 선생은 박정희 정권의 불도저식 도시개발과 졸속개발의 면면에 대해 비판의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이 개발로 인해 내쫓기던 민중을 중심에 뒀고, 그들의 어두운 일면을 지나치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1970년 4월 완공 4개월 만에 붕괴된 ‘와우 아파트 사건’이다. 와우 아파트는 한 마디로 총체적 부실이자 예고된 사고였다. 당시 정권의 충복이었던 김현옥 서울시장은 단시간에 말도 안 되는 저비용으로 아파트 시공을 명령했다. 그것도 청와대에서 잘 보이도록 기반이 약한 산 중턱에 건설을 명했다.

김중업 그리고 이승택 등과 협업]올림픽 세계평화의 문은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입구에 소재하고 있다. 1986년 설계하여 1988년 9월 12일 준공하였으나, 김중업은 준공 4개월을 앞둔 5월 11일에 작고하여 완성된 모습을 보지 못했다.

1988년 세계평화의 문

이 문은 올림픽정신을 구상적으로 표현하고 대회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세 차례의 설계변경 끝에 한국의 전통적인 문(門)의 개념을 도입,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의 조화를 이루게 한 설계안이 준공되었다.

높이 24m, 지붕길이 62m, 폭 37m의 거대한 규모로 몸체는 철근콘크리트에 화강석판을 붙였고 지붕은 철골트러스구조에 동판덮개를 씌웠다. 지붕아래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사신도가 판화가이자 디자이너인 백금남에 의해 단청이다.
이승택 작품

세계평화의 문 앞쪽 마당에는 괴면 두상 조각을 얹은 열주가 길게 나열되어 있는데 이는 미술작가 이승택이 제작하였다. 
평화의 문은 가장 한국적인 문양에 보편적 정서가 남긴 문 디자인을 통해 88세계 올림픽의 평화정신을 구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평화의 문에 부분 장식화의 쓰인 디자인 작품 고구려 문양이 들어간 역동적인 분위가 연출되었다


김중업 총체적 예술가의 역할도 하다 모던 건축언어를 어떻게 사회문화적으로 한국에 적용했는지를 살펴보면 흥미로울 것 같다 김주업 건축을 통해서 서울을 전체적으로 통채로 조감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한다

50년대 모더니즘 건축언어를 어떻게 한국사회에 적용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서병준산부인과

1965년 설계, 1967년 준공된 서병준산부인과의원은 현재 장충동에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로 향하는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이 건축물은 김중업 건축 모티브의 하나인 ‘증식하는 원’의 구성방식으로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산부인과 병원으로 지어진 이 건물은 대지조건이 협소하고 세모진 대로변에 위치했다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조형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변화가 가능한 곡선을 사용하여 독특하면서도 기능적으로 설계되었다.

서병준산부인과

특히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자유로운 곡선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으며 투명한 유리창과의 대비를 통하여 생명의 탄생을 상징하는 조형성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현재는 아리움 디자인회사 사옥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용도 변경을 하면서 공간을 확장하였다.

<예술적 사유와 실천> 김중업은 예술가로서의 건축가 상을 평생 추구했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자본과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서 건축을 자율적으로 독립시키기 위한 시대적 요청과도 관련이 있다. 그는 1956년 파리에서 귀국 후 건축가로서는 최초의 개인전이었던  《김중업 건축 작품전》을 개최했으며,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건축가의 작가적 입지를 알리는 데 힘을 썼다.

또한 김중업은 해방공간 부산 시절부터 교유했던 예술가들과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작업을 진행하며 작가들의 전시나 작품을 후원하는 등 문화예술계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김중업은 주한프랑스대사관, 올림픽 세계평화의문 등을 통해 예술가들과 적극적으로 협업했으며, 조각, 스테인드글라스, 타피스트리 등을 건축에 접목하며 건축을 매개로 한 총체예술을 구축하고자 했다. 이 섹션에서는 1971년 귀국 직전에 프랑스 영화감독과 함께 주한프랑스대사관과 삼일빌딩, 도큐호텔 등을 배경으로 만든 건축영화 ‘건축가 김중업’도 상영한다.

[김중업 대표작인 프랑스대사관 건물을 근간으로 이번에 미래지향적 소통을 주제로 한 새 건물이 들어섬]

1961년에 지운 프랑스 대사관 리모델링에 대한 설명을 하는 정다영 학예연구사


1961년 김중업의 설계로 충정로 언덕에 완공된 프랑스대사관은 관저인 본관동과 파빌리온(옛 사무동), 정원으로 이뤄져있다. 새 리모델링 설계안은 부드러운 곡선 처마로 지어졌다가 각이 꺾이는 모양새로 개축된 파빌리온의 지붕선과 메워진 1층 필로티(빈공간) 구조를 원상 복원한다

프랑스대사관 모델 대사관 생활공간 공개

1961년에 지운 프랑스 대사관 리모델링에 대한 설명을 하는 정다영 학예연구사(동영상) 1961년에는 거의 주변에 빌딩이 없는 시절에 만들어진 프랑스대사관 그러나 개발독재시절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고층빌딩에 갇혀버린 프랑스대사관 처음의 의도대로 이 공간을 도시의 아크로폴리스적 소통의 역할을 회복하고 건축가의 원래적 의도를 되살리는 방향으로 리모델링이 될 예정이다.

프랑스 대사관

한국 현대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은 1960년 설계하여 1962년 준공되었다. 경사진 대지에 관저와 대사관 및 예술관 등의 세 개 건물이 보행자의 시각 전개에 따라 서로 적절한 각을 이루며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다.


관저와 대사관 건물의 지붕은 한식 기와지붕처럼 하늘로 치켜 올려져 콘크리트임에도 불구하고 가벼운 느낌이다. 관저에는 우리의 궁 건축요소를 도입했고 대사관 건물에는 민가 건축요소를 가미했다. 관저 외벽을 장식한 모자이크는 옛 기와조각과 자기를 부숴 제작한 것이다.

프랑스현직대사가 내부를 공개하다

이 벽화 제작에는 윤명로, 김종학 작가가 참여했다. 이 벽화는 당시 국제 건축계의 화두인 ‘예술의 종합론’의 맥락 속에서 진행되었지만, 토속적인 재료를 추상미술의 형식과 기념비적 스케일로 재구성함으로써 국제주의 건축에 한국성을 극적으로 도입했다.

프랑스대사관 내부 인테리어

태양의 집

서울시 영등포구에 위치한 지하1층, 지상3층, 연면적9,570㎡ 규모의 철근콘크리트조 쇼핑센터이다. 1979년 설계하여 1982년 준공하였다. 태양의 집은 영등포구 신길동 대로변 모퉁이에 위치하며 현재는 썬플라자라는 쇼핑 센터이다.

김중업은 이 건물을 부담 없이 들어가 구경할 생각이 드는 곳이 되길 바라며 설계했다고 했다. 그는 “파는 사람도 즐겁고 사는 사람도 즐거운 곳, 비바람을 막은 장터와 같은 곳, 서민적이면서도 귀티가 나고 나도 모르게 내가 돋보이는 곳, 누구나 친한 벗처럼 느껴지는 곳, 이런 감회를 살려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낯선 모습일지 모르나 상품이 보는 이의 감정을 윽박지르는 서울 거리에 이런 집이 기다려진 지 오래다”라고 건축가로서의 소회를 밝혔다. 이 건물에는 원형 모티브, 램프, 곡면의 사용 등 다양한 김중업의 건축 언어가 종합적으로 병치되어있다.

서강대학교 본관

1958년 설계되어 1960년 준공되었다. 노고산 능선에 평행하게 세워진 서강대학교 본관은 이전까지의 작품과 달리 엄격한 비례, 면 분할, 지형과의 조화적 형태구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본관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우측으로 보이는 격자 형태의 외부 차양막은 오후가 되면 건물 내부로 깊숙이 파고드는 햇빛을 막기 위해 설치됐다. 정교하게 계산된 차양막의 각도 때문에 내부에선 시시각각 빛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다소 평범해 보일 수 있는 본관 업무동 건물의 핵심은 지붕이다. 하늘로 치켜선 형태의 얕은 지붕을 각 기둥에 걸치듯 띄워 건물을 바라볼 때 시선이 흩어지지 않도록 했다.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건축언어를 찾고자 애쓰던 시절의 작품이나, 모듈러 이론 등 그의 영향이 여전히 드러나 있다. 시공 당시 있었던 굴뚝은 현재 철거되고 없다

[김중업 1978년 망명생활에서 귀국]

1971년 광주대단지 필화사건(1971년 8월 10일 광주대단지 주민 5만여 명이 정부의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이에 대해 발표한 글로 박정희 정권의 제재를 받음)을 계기로 파리로 추방되었다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미국 '로드 아일랜드' 대학과 '하바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외국생활 7년 만에 귀국했을 때 인터뷰 기사


박만우 전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의 말에 의하면 백남준은 미국 우주항공국(NASA)의 천체물리학자나 하버드대 생의학 교수 같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 첨단 분야 전문가와 석학 등 1500명과 지속적으로 교류하며 상호 소통했다고 하는데 이런 점이 그를 세계적 작가를 넘어 세기적인 작가가 되게 한 것이다 김중업도 1977년 프랑스 망명시절 백남준과 김중업은 인연을 맺고 우정을 나누다 여러 예술가들과 협업도 시도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죽자 1970년대 말 귀국하여 다시 건축설계 작업을 시작하게 된다.

*김중업도 나름 많은 아티스트와 교류를 가졌다 특히 파리에 망명생활을 할 때인 1977년 백남준, 김차섭(1942년생 서울대와 뉴욕 프랫에서 미술전공) 등과도 친분을 맺었다 일종의 네트워킹을 한 셈이다 그리고 1971년 건축영화 <건축가 김종업>을 프랑스 영화감독과 협업을 통해 작업을 하기도 했다

<기억과 재생> '기억과 재생’은 넓은 의미의 건축적 기억과 그것의 재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기념비로 기획된 건축부터 현재 사라지고 있는 김중업의 건축물, 그리고 현 시대의 요청에 따라 새로운 역할을 부여받아 변화를 앞두고 있는 건축물 등 넓은 의미의 건축의 시간성에 대해 논의하고자 한다. 지어진지 대부분 50여년이 된 김중업의 건축은 건축의 수명, 도시 재생, 현대적 문화 유산의 보존과 제도 등 건축을 둘러싼 기억의 여러 논의들을 가능하게 하는 출발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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